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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정론 기획기사] - 직분, 새롭게 하자 (성희찬 목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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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나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회복하였을까요? 행사만 요란했지 세습을 포함하여 개혁에 역행하는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한국이 복음을 받은 지 130여년 후에 교회는 이 민족에게 길을 제시하기는커녕 스스로 길을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우리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서는 교회는 지속적으로 짓밟히고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차분히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치열하게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서양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 교회가 처한 도전과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근원적인 질문과 문제제기를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500년의 문을 여는 이 작업에 함께 뜻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 편집장 주

 

 

 

직분, 새롭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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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찬 목사

(마산제일교회)

 

 

   500년 전 종교개혁은 한편으로 교회 내의 직분과 직분의 회인 치리회의 개혁, 말하자면 교회정치와 교회권징의 개혁이기도 하였다. 개혁가 칼빈(1509-1564)은 그의 글, “교회개혁의 필요성”에서 당시 교회개혁이 왜 근본적으로 필요하였는지에 대해 역설하였다. 그는 거기서 바른 교훈(교리)을 교회의 영혼에 비유한다면, 목회의 직무와 성례와 함께 교회정치는 그 영혼에 호흡을 주고 활기 있게 하고 활동하게 하며 죽어 무용한 시체가 되지 않게 하는 교회의 몸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즉 칼빈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바른 교훈을 통해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고 또 이러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교회의 몸에 해당하는 성례와 목회의 직무와 직분과 치리회와 교회정치가 타락한다면 이는 곧 교회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예배의 타락과 교리의 부패로 이어지며 마지막에는 전 회중의 타락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500년 전 당시 교회는 바로 이러한 부패와 영적 위기를 실제로 겪고 있었다.

 

   이에 종교개혁 당시 개혁가들은 교회를 새롭게 세울 때에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배를 개혁하고 나아가 직분과 직분자의 회, 교회정치를 개혁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예를 들면 칼빈은 자신이 목회한 제네바 교회에서 강단에서는 바른 교훈의 설교를 하고 요리문답을 작성하여 다음 세대에 바른 교훈을 가르치며 시편 찬송을 만들어 예배에서 회중이 부르도록 하고 매주 금요일은 목회자들이 모여서 바른 교훈 토대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모든 교회안팎의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제네바 교회조직 및 예배 지침들>(1537년), <제네바교회정치>(1541년)를 작성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교회에 있어야 할 각 직분과 치리회의 고유한 직무를 해설하고,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당회와 그 직무에 대해, 예배의 시간과 장소, 권징에 대해, 성찬에 대해, 심방에 대해, 결혼과 이혼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칼빈만 아니라, 개혁가 요한 아 라스코 역시 그가 사역하는 교회의 개혁을 위해 교회정치(1555년)를 작성하였으며,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교회 역시 요리문답과 함께 팔츠교회정치(1563년)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또한 신앙고백서와 함께 제1권징서(1560년), 제2권징서(1578년)를,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 요리문답, 예배지침과 함께 교회정치(1645년)를 작성하여 무엇으로써 교회가 바르게 되며 또 무엇으로써 교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좋은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이와 같이 개혁가들은 교회건설에서 교리의 개혁과 예배의 개혁을 이어 직분의 개혁에도 전념하였다.        

 

   지금까지 본 대로 교회에서 직분과 직분자의 회인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교회는 예배 공동체인데 직분자는 바로 이 공예배에서 은혜의 방편(설교와 성례와 기도)을 다루는 자들, 즉 구원을 전달하는 자들이요, 그리스도가 위임한 권위,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치리를 대신하는 자들이며, 회중은 바로 직분자의 손을 통해 말씀과 성례라는 은혜를 공급받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루신 구원의 은덕을 제공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분자가 서고 넘어지는 여부에 의해 공예배 시에 직분자를 매개로 전달하는 것이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독이 있는 음식이 될 수 있고, 그가 행사하는 권세가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부당한 권력이 될 수 있으며, 또 그가 봉사하는 공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연이 될 수 있고, 그들이 다스리고 감독하고 돌보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될 수도 있으며 결국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께서 본래 의도한 대로 봉사를 위한 직분이 아니라 명예를 위한 직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몸에 해당하는 직분과 직분의 회인 치리회가 타락하면 교회의 영혼에 해당하는 예배와 교리가 부패하기에, 우리는 교회개혁을 말할 때마다 예배와 교리에 이어서 직분을 새롭게 하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몸에 해당하는 직분과 직분의 회인 치리회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일까? 작년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는 여러 목소리와 글을 들어볼 때 지금 우리의 모습은 교리와 예배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정치의 측면에서도 볼 때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분과 치리회의 영역에서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어 있고, 어떻게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일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자임을 망각하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 채 다수의 교인들이 명예와 탐욕에서 장로와 집사, 권사가 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는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은 것이며, 제1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이며, 일제 시대에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자는 누구다 주께 받은 바 주의 기름부음 즉 주의 성령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요일 2:27).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구약교회에서 직분자들(왕, 제사장, 선지자)이 기름을 부어 세워진 것처럼, 2천 년 전 우리의 구주께서 이 땅에서 와서 구원 사역을 행하실 때 성령으로 기름 부어져 그리스도라는 직분자로서 세움을 입고 구약의 직분자들의 직무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이제 신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동일한 기름부음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32문답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런데 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까? 왜냐하면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에 참여함은 내가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증인이 되며,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고, 또한 왕으로서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와 마귀와 더불어 싸우며 이후로는 그와 함께 영원히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기 위함입니다."(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제32문답)

 

 

   이 시대에 교회의 직분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모든 신자가 주께 받은바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직무를 신실하게 이루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 직분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신자가 먼저 모든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한다(벧전 4:16). 만약 어떤 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직분자로서 생활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서 목사가 되고 장로 집사 권사가 되는 것에 더 마음이 가 있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첫 단추가 잘 못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인의 직분자가 된 것을 자랑하며 이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이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둘째, 교회의 항존 할 직무 때문에 직분이 나오고, 이를 위해서 이에 적합한 은사와 재능을 받은 소수의 사람이 그 직분으로 부름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직무와 상관없이 그 직무를 수행하기에 필요한 은사와 재능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직분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교회마다 교회의 항존 직무가 위기에 처해 있고, 이로써 교회의 표지가 퇴색해지고 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통해 교회에 항존 할 직무를 위해 주님께서 각 직분을 주신 것을 알았다. 스코틀랜드 제2권징서(1578년)는 교회의 항존 직무는 설교와 성례를 통한 바른 교훈, 권징, 구제, 셋이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목사와 장로, 집사라는 직분이 주어졌다고 하였다. 교회가 이 땅에 서 있는 동안 항존 할 직무 혹은 기능 때문에 직분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 직무를 흠 없이 수행하기 위해 직분이 있고 이를 위해 은사를 받은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다. 이 항존 직무는 교회의 참된 표지 셋(설교, 성례, 권징)과도 연관이 있다. 그래서 이 직무가 소홀히 된다면 교회의 공적 직무가 짓밟히는 것이며 교회는 교회로서 가져야 할 참된 표지를 세상에 대해 드러낼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의 공적 직무 즉 공적 사역과 상관없이 사람을 세우고 있지 않는가? 나이와 지위와 혈연/지연 등의 끈 때문에 사람을 세우고 있지 않는가? 오늘 교회에서 직분자의 봉사를 통해 항존할 직무가 흠없이 수행되고 있는가? 바른 설교와 성례의 바른 시행과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제 그 직무와 상관없이, 그 직무를 수행할 은사와 재능과 상관없이, 심지어 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신앙의 자질과도 상관없이 사람을 세워서 직분자로 세웠다고 하자, 과연 그들의 손을 통해 전달될 은혜의 방편과 구원이 제대로 회중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또 이들이 얼마나 회중을 영적으로 잘 감독하여 그들이 일상에서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의 영적 기근과 영적 피폐는 교회의 항존 할 직무를 우선 생각하지 아니하고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직분자로 선출하지 않는 데에 큰 책임이 있다.

 

 

   셋째, 직분자를 선출하고 청빙할 때 하나님께서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을 통해 직분자를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소명 사상이 상당히 약화되어 가고 있다.

 

   목사를 청빙할 때나 다른 직분자를 선출하여 청빙할 때에 비록 회중이 선출하지만, 사실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께서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을 통해 직분자를 부르시고 세우신다. 이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의 직분자를 부르시는 방법이다. 그런데 500년 전 당시 교회는 고위 성직자가 각 교회의 직분자를 임명하였기에 직분을 사고파는 행위가 아주 흔하였다. 한편 교회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극단적인 개혁을 주창한 자들은 직분자의 내적 소명만을 강조하여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을 통한 외적 소명은 무시하였다. 이에 대해 개혁가들은 외적 소명을 중시하면서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을 통해 하나님이 직분자를 부르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 토대에서 목사 뿐 아니라 장로와 집사를 회중이 청빙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날 교회직원의 선출과 청빙과정, 봉사 등을 보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소명 신앙이 크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몇 가지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야망과 명예욕에서 직원이 되려고 하는 자세,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과 회중에 의한 청빙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찾고 하나님의 소명을 조용히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 직분자가 되기를 나서거나 인위적인 선거 운동을 하는 것, 장로의 수를 교인의 수와 관계없이 늘이려는 태도,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서 직원을 선출하기(돈, 지위 등),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고백보다는 우리가 장로를 선출하였다는 생각, 우리가 목사를 채용하였다는 생각, 우리와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목사를 교체할 수 있다는 생각, 교회직원이 스스로 하나님의 대표자이기보다는 교인의 대표자라는 생각으로 교인의 눈치를 보며 봉사하는 행동, 그래서 어려움이 찾아오면 쉽게 직분의 봉사를 포기하는 행위, 객관적인 자격보다는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자격을 요구하는 목사청빙공고와 이에 부응하는 화려한 이력서 등이다.

 

   속화되어 있는 직분자 선출 및 청빙에서 속히 하나님의 주권 신앙과 하나님의 소명 신앙이 회복되어야 한다.

 

 

   넷째, 이와 같이 직분자가 항존 할 직무 때문에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지 않을 수 없고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데 상당수의 직분자들은 직분을 명예와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무익한 종들을 직무와 기능 때문에 일정한 기간에 부름 받아서 주님과 주님의 회중을 위해 봉사할 자들로 부름 받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직분을 신분과 지위, 계급이나 서열로 생각하고 명예와 권세로 여기고 있다.

 

   교회에서 일부 직분자들이 우리 집 안에 장로가 몇 명이며 권사가 몇 명이라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교인들이 직분을 명예로 여기는 풍조는 입신양명과 감투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회에서 기존 직분자들이 이런 분위기를 암암리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직분을 봉사하며 복음과 회중을 위해 오해와 비방과 박해를 받고 십자가 지는 것을 감수하기 보다는 이를 은근히 부러워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에는 마음이 없고 직분의 명예에 더 마음이 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명예 권사를 세우고 원로 목사, 원로 장로를 세우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일 것이다. 또 집사보다는 장로가 더 높고, 권사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직분을 명예로 여긴 것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목양의 직무를 중시해야 할 당회와 노회 등의 치리회가 거의 행정에 치우치고 있다.

 

   교회정치에서 규정하는 당회의 직무를 보면 교인의 영적 상태를 살피며 유아세례, 학습, 세례, 입교를 통해 교회에 들어올 자를 심사하고, 이명 증서를 교부하여 교회의 출입을 지킬 뿐 아니라 목사가 설교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살피기 위해 심방하여 권면하고 책망하고 교인 중에서 교인과 함께 교인을 위해 기도하며 또 목사와 협력하여 예배를 돕고 권징을 하는 것 등인데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목양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직분자는 사실 목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회는 병든 양을 고치고, 약한 양을 강하게 하고, 상한 양을 위로하고 잃은 양을 찾아오고, 쫓긴 양을 돌아오게 하는 목자의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당회 등의 치리회의 현실을 보면 양떼에는 마음이 별로 없고, 목양과는 거리가 먼 것을 볼 수 있다. 재정이나 교회가 해야 할 여러 사업 시행 등은 집사나 제직회에서 해야 함에도 당회가 이를 놓지 않고 있다. 목사를 불필요하게 견제하는 일을 하고 교인을 험담하며 큰 교회에서 주일 예배 후에는 당회실에서 나오지 않고 종일 TV를 보며 잡담하기도 한다. 유아세례 학습 세례 입교 문답에는 거의 마음이 없다. 교구 장로가 되어서 교인을 심방하는 것에는 더욱 그렇다. 교회의 이사회 마냥 생각하고 있으며, 교역자 청빙에도 부당하게 개입하려고 한다.

   치리회의 본래 직무인 목양보다는 노회의 총대로, 총회의 총대로 가려고 온갖 수작을 부리고, 노회와 총회의 임원, 나아가 노회나 총회 소속의 이사회와 기관, 기타 연합회의 임원 되는 것에 더욱 에너지를 쏟고 있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은 그 치리회라는 회의체의 의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대표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치리회의 본래 직무인 목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회부터 속히 목양의 본래 직무를 회복해야 한다. 목양 외에 다른 일은 거기에 은사와 재능을 가진 적절한 사람을 세워서 맡겨야 한다. 그리고 당회원은 심방과 예배, 기도, 권징, 목양에 힘써야 한다. 당회원의 직무 수행이 어려우면 장로 임기제나 윤번제를 도입해서 적절하게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노회는 목사 후보생과 목사를 감독하고, 장로를 세우는 일과 개체교회의 일을 돌아보는 것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총회는 총대 수를 대폭 줄이며 총회의 상비부 뿐 아니라 산하 기관의 조직과 규모를 과감하게 축소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을 보면 갈수록 조직을 확대하고 거기에 자리를 만들어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경쟁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나아가 총회의 고유직무인 신학대학원의 경영과 교역자 양성, 교단 간의 교류와 연합 사업, 각 노회들을 돌아보는 것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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